▒ 한국산악회 해외원정등반훈련대 10명 조난사고사
1960년대 많은 산악인들이 설악산을 찾기 시작하면서 설악산에서의 조난사고는 계속 이어졌다.
1965년 7월 10일에 에코클럽의 이원상이, 7월 16일에는 같은 클럽의 김정규가 비선대 건널목 같은
자리에서 급류에 휩쓸려 익사하였다.
1967년 1월 하순에는 소청봉에서 서울의대예과 1년 이모군이 동사하였고,
1968년 10월 26일에는 가톨릭의대 산악부원 7명이 십이선녀탕 계곡에서 조난을 당하였다.
1969년 2월 14일에는 다음해 해외원정을 위해 대청봉과 죽음의 계곡에서 동계 훈련을 하던 한국산악회
이희성 대장을 비롯한 10명의 대원이 눈사태로 조난을 당했다. 또 1976년 2월 16일 대한산악연맹 히말라야
등반 동기 훈련 중에 설악골 범바위 밑에서 최수남 전재운 송준성이 눈사태로 조난을 당하였으며, 토왕성
폭포 빙벽을 오르다 추락하여 조난을 당하는 일도 가끔 발생했다.
이기섭은 속초에서 외과의원을 개업하고 있는데다 산악회 회장이라서 설악산 조난사고가 나면 꼭 설악동
으로 달려가곤 했다. 70년대 설악산 적십자구조대를 창설했던 유창서씨는 산악인이 조난사고로 사망하면
이기섭 박사가 쫓아와서 사망진단을 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야만 시신을 옮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기섭은 또 조난사고 소식을 들으면 직접 구조활동에도 참가
하였다. 이기섭은 74년 청룡봉사상 수상 소감에서 1969년에 비룡폭포에서 조난된 여학생 2명을 낚시로
건져냈을 때 가슴이 아팠다고 나중에 회고하였다. 산악인들도 설악산에서 다치면 꼭 이기섭의원을 찾았다.
같은 산악인이라 치료비도 받지 않았다.
산악인 이기섭의 가슴에 큰 아픔의 상처로 남은 사건은 1969년 한국산악회 해외원정등반훈련대 조난사고,
소위 10동지 조난 사고였다. 죽은 산악인들은 신흥사 보제루 앞에서 열린 훈련 발대식에서 이기섭이 직접
참여하여 무사히 훈련을 마치라고 격려하고 일일이 등을 다독거려주고 굳은 악수를 건네 준 친동생, 친아들
같은 대원들이었다.
그리고 조난을 당했다는 비보를 가장 먼저 전해 듣고 설악동으로 쫓아간 사람도 바로 그였으며, 보름 동안
설악동에서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구조활동에 매달렸지만 싸늘하게 돌아온 주검을 마지막으로 사망확인한
의사도 그였다. 구조활동을 마치고 모두들 철수한 상황에서 설악산 자락 노루목 언덕에 직접 시신을 묻고
애통해 했던 사람도 그였다.
이기섭은 그들을 설악산 산기슭에 묻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 속에 묻고 평생의 아픔으로 간직하였다.
이기섭은 1993년 설악산에서 작고한 산악인을 추모하는 [산악인의 문]을 세우는 소공원 현장에서 1969년
사고 당시의 기억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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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당시의 조난사고와 구조활동 전말을 정리한 글이다.
1969년 2월 14일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해외원정등반을 위한 훈련을 하고 있던 한국산악회(韓國山岳會,
회장 이은상) 대원 10명이 계곡을 덮은 거대한 눈사태로 사고를 당한, 우리나라 등반사상 최대의
조난사고가 발생했다.
한국산악회는 1970년도에 본격적인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원정등반을 하기로 계획하고, 2월 6일부터
설악산에서 훈련을 실시하던 중이었다. 2월 6일 신흥사 보제루에서 대원 18명은 한국산악회장 이은상,
설악산악회장 이기섭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결단식을 갖고, 1조 3명씩 A. B. C. D조로 나누고
나머지 6명은 본부조(E조)로 편성하여 훈련에 임하였다.
비선대를 거쳐 천불동계곡으로 들어간 훈련대는 12일에 A조(한덕정, 정현식, 이인정), D조(구인모, 오동석,
강신영), E조(전담, 이재인) 8명과 그 외 촬영차 동행한 국립영화제작소 박태규 등 9명은 주봉인 대청봉
정상에 캠프를 설치하였고, B조(박은명, 변명수, 박명수), C조(오준보, 이만수, 김종찬), E조(대장 이희성,
부대장 김동기, 부대장 남궁기, 임경식) 10명은 죽음의 계곡에 8인용 본부천막과 3인용 천막 2개를 쳐서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였다.
죽음의 계곡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B조, C조, E조는 13일 빙폭 훈련을 마치고 잠을 자던 중 14일 새벽
계곡을 덮은 거대한 눈사태에 묻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다. 이들의 훈련 광경을 촬영하기 위해
일행과 같이 산에 올랐던 국립영화제작소 박태규가 A, D조가 있던 대청봉에서 하산하면서 13일 오전 10시
이곳에 이르렀을 때만 해도, B, C조 대원들은 빙폭 등반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4일 정상에 있던 A, D조 대원들이 훈련교대와 식량보급을 받기 위해 베이스캠프가 있는 죽음의
계곡에 도착했을 때, 거기 있어야 할 대원들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높이 약 20m 가량의 눈이
계곡을 덮고 있었다.
베이스캠프도 눈사태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폭포엔 얼어붙은 로프와 붉은 자일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대청봉에서 내려온 A, D조 대원들은 B, C조 대원들이 혹시 양폭산장에 대피 중이 아닌가 생각하고 내려가
보았으나 이곳에서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식량 보급을 받을 길이 없어진 대원들은 비상식량을 꺼내 먹으면서 15, 16일 양일 동안 일대를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허사였고 계속 내리는 폭설로 천불동계곡마저 눈사태로 묻혀 죽음의 계곡 베이스캠프에는
갈 길마저 막혀 버렸다.
할 수 없이 8명의 대원들은 구조를 요청하고자 17일 오전 8시 양폭산장을 출발하여 오후 3시10분
신흥사에 도착하여 설악산악회장 이기섭에게 사태를 알렸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김준수 속초경찰서장 지휘하에 경찰 구조대를 편성하여 밤에 설악동에 도착했다.
18일에는 한국산악회 구조대(대장 변완철)와 육군 1619부대 구조대(대장 마숙도 중위)가 도착했다.
구조대는 19일 와선대에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20일 귀면암까지 전진했으나, 계속된 폭설로 구조를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22일 다시 구조 활동을 재개하고, 23일에는 미군 헬리콥터로 대청봉과 중청봉 중간 지점에 착륙하여
죽음의 계곡으로 접근하려고 했으나 눈사태의 위험으로 그냥 돌아오기도 했다. 계속되는 폭설과
강풍으로 구조 활동은 계속 지연되었다.
25일에는 천종근 강원도 경찰국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군·경·민 합동 지휘본부가 새로 설치되어
본격적인 수색 작업이 재개되었다. 26일에는 드디어 죽음의 계곡 현장에 도착하였고 발굴 작업을
시작하였다.
27일에는 그들의 유품이 발견되기 시작하였고 3월 1일 시체가 발견되기 시작하여 3월 3일까지
10구의 시체가 모두 발굴되었다.
시체는 대원들이 결단식을 했던 신흥사 보제루로 옮겨져 3월 5일 합동장례식이 거행되었고 시신은
설악산 입구 노루목 묘지에 안장 되었다. 대장 이회성은 현역 군인인 관계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고
부대장 김동기 교수도 선영에 안장되었다. 그러므로 노루목 묘지 2개의 봉분에는 시신없이 유품만
매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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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난자 명단(10명)
▶ 이희성, 43세, 대장, 육사교수(중령)
▶ 김동기, 39세, 부대장, 서울대 공대 교수
▶ 남궁기, 40세, 부대장, 한국전력
▶ 변명수, 24세, 서울대 문리대
▶ 이만수, 22세, 에코클럽
▶ 오준보, 24세, 연세대
▶ 임경식, 29세, 아카데미사진연구소
▶ 박은명, 23세, 육군본부
▶ 김종철, 21세, 연세대 수학과 2년
▶ 박명수, 21세, 서울대 문리대 4년
☞ 자료출처 / 속초문화원 발간, 2006년에서
▼ 아래의 동영상은 당시 대한 뉴우스에 소개된 영상자료이다.
2009/10/23 - 휘뚜루 -
자비송 / Imee O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