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10동지 조난사고 고 이희성씨 산행일기 공개 설악산 10동지 조난사고 고 이희성씨 산행일기 공개 흰 눈 속에 묻힌 맑고 곧은 삶 글 이영준 기자 ![]() ▲ 산행일기 13권. 1969년 2월 14일 10명의 희생자를 낸 설악산 죽음의 계곡 눈사태는 36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산악계에 더없이 안타까운 사고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한국산악회 ‘해외원정을 대비한 제1차 적설기 설악산 훈련대’의 고 이희성 대장이 쓴 1962년부터 1969년까지의 산행일기 13권이 최근 발견되었다. 고인의 딸이 35년간이나 간직해 온 산행일기의 사연을 들어본다. ‘눈보라에 떨면서 눈과 싸우고 미끄러지면서 언덕길을 내려가야 했지만, 캠프를 가설해 놓으면 안정된 살림살이(에) 바람 아니라 세상없는 추위가 닥쳐온다 한들, 텐트 속에서 배부른 만족감으로 여흥을 즐길 수도 있는 것이다. 장비가 있고 식량이 있는 한까지. … 이것이 산 생활의 하루이고 이렇게 산 속의 하루를 보내면 또 내일이 시작된다. 캠프 밖은 아직도 바람이 세차게 불어댄다.’ - <산서> 15호에 실린 ‘1962년 겨울의 십이선녀탕 등행기’ 중에서 산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 구절은 지금으로부터 43년 전인 1962년 겨울 8박 9일간 설악산 십이선녀탕 계곡을 등반했던 고 이희성씨의 일기다. 고인은 1946년 한국산악회에 입회한 이후 1969년 44세의 나이로 생을 마칠 때까지 1956년과 1957년 1·2차 적설기 한라산 등반, 1959년 한국산악회 등반위원회 결성, 1962년 대한산악연맹 창립 등 초기 한국 산악사에서 굵은 발자국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산행 때마다 기록을 꼼꼼히 남겨 13권의 노트로 정리했다. 먼저 일기를 내어준 딸 이해숙씨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고인의 명복을 빈다. “문학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한 분” “아버님은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해 설악산으로 떠나는 길에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힘이 들어 당분간은 산을 쉬어야 겠다’고 말씀하신 게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날은 언니가 아버님을 배웅했습니다. 지금 살아계신다면 79세가 되셨겠지요. 아버지의 군인 연금 때문에 생활의 불편은 없었습니다.” 어렵게 고인의 둘째딸인 이해숙씨(52세)를 만날 수 있었다. 대전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그는 시종 아버지에게 누가 될까 조심스러워했다. 아직 부인인 표은숙 여사도 계시고 함께 산행하던 분들도 지금까지 산악계에서 중요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행일기는 우연하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지만 개인적 내용이 담겨있는 아버지의 유품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천천히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산악인 이희성의 모습이 그려졌다. “가정적이고 친근한 면이 많아 생전에 언니와 함께 서울 근교산행도 여러 번 했었습니다. 하지만 겨울 지리산에 등반하러 가시면 한달씩 집을 비우시곤 했습니다. 스키도 잘 타시고 산사진에도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꽃과 음악과 글쓰기도 좋아해서 뭐든 기록을 많이 하셨지요. 하지만 평소에 산을 강조하거나 특별히 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원고를 교정보았던 기억이 있다. 때문에 고인의 다섯 딸 중 산을 가장 많이 접하고 아버지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아버님은 문학적이고 감수성도 풍부한 분이셨습니다. 2층 다락방에 아버님의 서재 겸 장비방이 있었는데 오래된 레코드판이며 <사상계>같은 책들은 50년대 판부터 빼곡히 꼽혀있던 기억이 납니다. 스키며 등산장비도 많이 있었고 사진도 여러 개 걸려 있었습니다. 전시회를 할 정도로 좋은 사진이 많았지만 지금은 거의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 중에는 아버님이 17, 18세쯤 되던 때인 해방 이전에 백두산에 올라 찍은 파노라마 사진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드문 사진이었는데 그걸 보고 천지의 모습을 알았지요. 저는 어릴 적부터 그 방을 좋아해서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이해숙씨는 13권의 일기 중 크기가 작은 두 권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먼 길을 갈 때면 지금과 한글 맞춤법이 달라 읽기 어려운 그것을 꼼꼼히 읽었다. 잦은 이사에도 일기장만은 먼저 챙겼다. 일기장에는 중요한 문서나 서류를 끼우고 다니기도 했는데 그것은 꼭 몸에 지녀야 할 어떤 부적과도 같은 의미였다. “어릴 적에도 아버님의 꿈이 히말라야였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지만,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일기장에 히말라야에 대한 자료가 무척 꼼꼼히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저도 언젠가 그 곳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희성 대장은 항상 산행에 앞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의 성품은 1969년 훈련 당시 대원들에게 지시한 내용 중 장비에 관한 부분에서도 잘 나타난다. 스키 사용에 관한 대원 각자의 기록을 다음과 같이 구분해서 남기도록 했다. 이제는 대중화된 스키 등반에서 지금도 하기 힘든 실증적 자료 수집을 시도했었다. ![]() ▲ 산우들과 함께한 기념사진. 가운데가 이희성씨. 맨 좌측이 고 김근원 산악사진가, 그 옆이 손경석 한국등산문화원장이다. ① 스키 사용시 씰과 노끈이 없을 때의 숫자적인 검토표 ② 몇㎏ 부하시의 검토표 ③ 적설량에 따른 빠지는 정도 ④ 보행 정도(예 : 200m 진출시 ① 의 사항) - 김영윤 <산으로 가는 마음>에서 발췌 “아버님의 산행이 주는 가치를 일찍 알았더라면 돌아가신 후에 많은 자료와 유품이 소실된 것을 막을 수 있었겠지요. 저는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산을 조금씩 알게 되었으니 안타깝습니다. 나중에 산에 다니면서 아버님이 훌륭한 분이었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고 유품을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 집에 데려온 적도 있었습니다.” 이희성씨의 일기에는 그의 산 철학이나 개인적 내용뿐 아니라 당시의 등반 형태와 용어 등도 알 수 있어 가치를 더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잘 나타난다. 지금의 좋은 장비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바람이 불고 추워지니 자연 행동이 둔해져서 아침을 해먹고 C1을 출발한 것이 11시 30분이다. 7시 기상에 9시 조식, 캠프 철수와 륙색을 꾸리는데 시간이 걸려서 11시 30분에 출발했다. … 12:50에 C2를 出發, 날씨는 그다지 추위를 느끼지 않고 양폭에 도착하니 역시 변함없이 blue ice가 얼어붙었다. 14:00 정각 ice에다 step을 cutting하면서 빙벽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상락씨가 선두에서 pickel로 cutting을 하면서 한발 한발 등행한다. 중간확보용 하켄은 ice용이 2개이고, 나머지는 rock용이라 짧아서 적당치는 않지만, 처음 하는 빙벽이라 자기확보가 중요하다. 하켄 용법상의 미숙함이 있기는 하지만 16:50 양폭의 아래쪽 빙폭을 올랐다.’-1962년 12월 30일, 1963년 1월 3일의 산행일기 중에서 그전까지 원자력연구소에 다니던 이해숙씨는 1986년 연구단지산악회를 만든 창립 멤버다. 현재도 활발히 활동하는 연구단지산악회는 그가 말하는 ‘제대로 된’ 산행을 많이 했었다. 한 때 연구단지 앞에서 등산장비점을 운영하기도 할 만큼 그는 산에 빠져있었다. 예술보다 높은 것이 산 “별명이 ‘노루’였어요. 남들보다 체력이 좋아 한번도 짐을 적게 지거나 뒤로 쳐져 도움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아버지를 닮아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며칠씩 겨울 설악산 종주산행도 하고 암벽등반도 열심히 했었는데 죽음의 계곡에 가보지는 않았습니다. 묘소가 있는 노루목에는 가봤지만요. 10년 전부터는 활동을 못하고 있는데 얼마 전 다시 산에 다니려고 워밍업 차원에서 계룡산에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그가 접하고 배운 산이란 단지 오르는 것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어제도 대원들에게 말했지만 산악가란 등산기술에 앞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산은 장엄하고 엄숙하고 진실한 것이다. 낭가파르바트를 초등정한 헤르만 불은 8000m대를 단독으로 초등정했지만 이러한 산악인은 참다운 산악인이 못 된다. 대장의 철수 명령을 어기고 낭가파르바트를 초등정했지만 그의 공보다는 팀을 파괴하고 독일의 산악사를 일조일석에 무너뜨린 파괴자이기 때문에 이런 산악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겸손하고 사양할 줄 알고 건실하고 진실한 가운데 솔선수범으로 팀을 훌륭히 이끌 수 있는 것이 등산기술에 앞선다는 것을 명심할 것.’ -1969년 2월 7일의 산행일기 중에서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일기의 한 구절이다. 고인이 생각하던 산이란 오르기에 앞서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고인의 철학은 항상 이해숙씨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예술보다 높은 것이 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이 가지고 계시던 그 느낌이나 정신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산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한때는 이희성 대장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따랐지만 전부 제가 생각해오던 산악인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림 그리는 취미가 있는 그는 틈틈이 캔버스 앞에 앉지만 아직 산을 그려본 적은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산’으로 나타나는 아버지의 상징적 이미지를 그려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제껏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고인의 모습에 대해서 물었다. “사고 이후 군 생활을 함께 하셨던 몇 분은 지금까지 가끔 찾아오시지만 산악인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운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10동지 추모제를 요새도 지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근래에 참석해본 적은 없습니다.” ‘남궁과 나는 어제 가설한 스노우 홀에서 잤다. 스노우 홀안에 랜턴을 켜놓고 반짝이는 설정체의 반사광선을 즐기면서 밤 11시에 잠이 들었다. 약간 습기가 있고 으쓱할 정도의 냉기가 도는 정도로 슬리핑백 속에 들어가니 과히 춥지도 않고, 바람에 천막 날리는 잡음이 없어 조용해서 좋았다. 새벽 5시에 잠이 깨어 출입구의 판초를 들쳐보니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다. 겨울등산에 비가 오면 탈이다. 제발 눈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오늘의 일과를 시작하였다.’ -1969년 2월 13일의 산행일기 중에서 계획대로라면 훈련을 마치고 2월 16일 가족들이 기다리는 서울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산행일기는 2월 13일을 마지막으로 더 쓰여지지 못했다. “전에도 컴퓨터로 옮겨 프린트해서 본 적이 있었지만 활자화된 인쇄물로 보는 것과 원본은 느낌이 달랐습니다. 일기는 개인의 기록이기 때문에 굳이 책으로 내지 않고 저 혼자만의 추억으로 가지고 있으려 했지만 후배들을 위한 자료적 가치를 따진다면 단행본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굳이 책을 만든다면 상업화되지 않은 것이어야만 하겠지요.”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몇 남지 않은 유품들이 상하지 않게 잘 보관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달리 보면 개인의 흔적이 아니라 우리 산악역사의 한 단편일 수도 있기에 마땅히 적절한 자리에서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살아서 한결같이 산을 사랑하던 그들은 이제 우리를 떠나 한발 앞서 저승으로 갔지만 그들의 삶은 그들이 사랑했던 눈과 에델바이스같이 희었고 그들의 죽음은 그들을 쓰러뜨린 눈의 그 빛과 같이 청순하였다’ -김영윤의 추도시 ‘오! 그들은 승리한 것이다’ 중에서 ![]() ▲ 당시 사용했던 설악산지도. 이희성 대장이 직접 트레이싱지에 옮겨 그린 지도는 자료가 귀했던 시절 그의 산에 대한 열정을 잘 말해준다. 지금의 양폭산장 부근이 베이스캠프로 표시 되어있다. 취재를 마치고 당시 훈련대의 준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영윤 한국산악회 자문위원의 추도시를 다시 읽어보았다. 3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흰눈 속에 묻힌 고인의 맑고 곧은 삶은 같은 산을 오르는 현재의 우리에게서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고민해 볼 일이다. 고 이희성 대장 연보 1926년 경기도 파주 출생 1946년 한국산악회 입회 1956년 1차 적설기 한라산 등반대 수송대원 1956년 울릉도 학생 해양산악훈련단 수송대원 1957년 2차 적설기 한라산 등반대 수송대원 1959년 한국산악회 등반위원회 결성 1962년 매킨리 원정 대비 지리산 등반훈련대 훈련대장 1962년 대한산악연맹 창립 지도위원 1963년 적설기 설악산훈련대 운행대원 1964년 한국산악회 학생지도위원장 1965년 방일등반대 북알프스 등반 1969년 해외원정을 대비한 1차 적설기 설악산 훈련대 대장으로 2월 14일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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